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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9) 리뷰(권력구조, 심리묘사, 결말분석)

by 캣 2026. 4. 30.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포스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며칠째 특정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8년작 더 페이버릿(The Favourite)을 본 뒤, 여왕의 의자가 내는 그 '끼익' 소리가 한동안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화려한 궁전 배경보다 인물들의 결핍과 권력 다툼이 훨씬 더 강렬하게 남는 영화입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 18세기 궁전이라는 무대, 그 권력구조의 민낯

더 페이버릿의 배경은 18세기 초 영국입니다. 당시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이 한창이던 시기로, 전쟁 지속 여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궁정 안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 문제로 촉발된 유럽 전역의 대규모 분쟁으로, 영국은 이 전쟁에서 군사·재정적으로 막대한 자원을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이 복잡한 정치 지형 한가운데 앤 여왕(Queen Anne)이 있고, 그 곁에 총신(寵臣) 사라(Sarah Churchill)가 있습니다. 총신이란 군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얻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을 뜻합니다. 사라는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여왕의 정치적 판단에까지 개입하는 사실상의 실세였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도 이 부분이었습니다. 화려한 드레스나 연회 장면이 아니라, 두 사람이 대화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권력의 비대칭성이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여기에 애비게일(Abigail Masham)이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가문을 몰락시켜 하루아침에 귀족 신분을 잃은 인물입니다. 사촌 언니 사라에게 의탁해 겨우 궁전에 발을 들여놓지만, 처음 맡은 일은 허드렛일에 불과합니다. 이 출발점이 영화 전체의 갈등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더 페이버릿이 그려내는 권력구조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여왕의 감정적 결핍이 권력의 공백을 만들어내는 구조
  • 사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왕과의 친밀감에서 비롯된다는 취약점
  • 애비게일이 그 취약점을 정밀하게 파고드는 상승 서사

 

심리묘사, 이 영화가 선택한 언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여왕의 집무실입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인데, 어딘가 공허합니다. 그 공허함을 만들어내는 장치 중 하나가 여왕의 의자입니다. 여왕의 신체 크기와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거대한 그 의자, 그리고 여왕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끼익' 소리. 처음엔 단순한 소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소리가 여왕의 불안정한 내면 상태를 청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미장센(mise-en-scène) 기법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직접적인 대사 없이 전달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카메라 앵글 등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피시아이 렌즈(fisheye lens)를 활용한 왜곡된 광각 촬영이 자주 등장하는데, 피시아이 렌즈란 180도에 가까운 초광각 화각으로 화면 가장자리를 극단적으로 휘어지게 만드는 렌즈를 의미합니다. 이 왜곡된 시선이 궁전이라는 공간 자체가 얼마나 비틀려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듭니다.

심리묘사가 가장 날카롭게 작동하는 지점은 애비게일과 여왕의 관계 변화입니다. 애비게일은 약초를 이용해 여왕의 신체 통증을 완화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접근합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여왕에게 먼저 신체적 위안을 제공하고, 그다음 감정적 의존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접근법은 영화 속 전략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도 꽤 자주 목격되는 패턴입니다.

영화 심리학 관점에서 이를 보면, 애비게일의 행동은 전형적인 조작적 애착 형성(manipulative attachment formation) 전략에 해당합니다. 조작적 애착 형성이란 상대방의 감정적 결핍을 의도적으로 채워주면서 자신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는 심리적 전술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단순히 영화 분석의 틀이 아니라, 실제 인간관계의 권력 역학을 이해하는 데도 유효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결말분석, 메꿔지지 않는 구멍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제 머릿속에서 지금도 재생됩니다. 애비게일은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귀족 신분도, 여왕의 총애도. 그런데 그 장면이 승리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비게일이 자신의 현재 처지가 어린 시절 남자들에게 이용당하던 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구조는 같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이었습니다.

여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비게일을 곁에 두었지만 몸 상태는 더 나빠지고 눈빛은 점점 공허해집니다. 결핍과 결핍이 만났지만, 서로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소진시킨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비판적으로 본 지점은 바로 이 애비게일의 행동 방식입니다. 영화 표면에서는 애비게일이 여왕을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연출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왕의 약점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여왕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서 들려주며,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과정입니다. 진정한 충성이라기보다 자기 생존을 위한 기생적 전략에 가깝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왕도 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하지만 애비게일이 제공하는 위안이 너무 중독적이어서, 그 의심을 스스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조는 실제 권력자들의 심리를 연구한 역사적 사례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영국 왕실의 총신 관계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앤 여왕과 사라 처칠, 그리고 애비게일 매샴의 실제 관계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출처: 영국 국립기록원 (The National Archives)).

더 페이버릿을 단순한 시대극이나 궁중 로맨스로 접근하면 이 영화의 핵심을 놓칩니다. 연출이 이 영화의 절반 이상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그 화려함 뒤에 숨은 공허함을 읽는 훈련이 필요한 영화입니다.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고 소진시키는지 보고 싶다면, 이 영화는 분명 오래 남을 겁니다.

 

 


 

애비게일의 역을 맡은 엠마 스톤의 또 다른 영화 '헬프'도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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