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미키가 열여섯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거든요. "저 사람들, 미키가 사람이라는 것을 잊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은 단순한 SF 블록버스터가 아니었습니다. 복제인간, 계급 착취, 외계 생명체와의 충돌이라는 세 개의 층위가 맞물리며 불편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카롱집 망해서 우주 간 게 아니었다 — 미키17의 세계관
혹시 영화를 보면서 "왜 하필 마카롱집 빚 때문에 우주까지 가냐"고 생각하셨나요? 저도 처음엔 그냥 웃어넘겼는데, 알고 보니 감독이 일부러 단순화한 설정이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미키는 역사학자였습니다. 기술이 너무 발전한 나머지 인간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보편적 기본소득(UBI, Universal Basic Income)이 보장되는 시대였죠. 여기서 UBI란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경제 제도를 말합니다. 풍요 속에 오히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미키는 스포츠 도박에 손을 댔다가 사채빚을 지게 되고, 탈출구로 탐사선을 선택합니다. 문제는 서류도 제대로 안 읽고 지원했다는 거고, 남은 자리가 익스펜더블(Expendable) 하나뿐이었다는 거죠.
익스펜더블이란 말 그대로 '소모품'이라는 뜻으로, 탐사 임무 중 사망해도 동일한 기억과 신체를 가진 복제 인간으로 재생산되는 직군입니다. 이 기술의 배경에는 반물질(Antimatter)이라는 에너지원이 있습니다. 반물질이란 일반 물질과 만나면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는 물질로, 10kg만으로도 지구의 모든 핵무기를 합친 것보다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에너지원이 무기화되면서 인류는 다행성 종족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탐사 과정에서 익스펜더블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겁니다.
영화에서 미키를 익스펜더블로 만든 건 그의 능력 부족이 아닙니다. 다른 직군들은 대부분 연줄과 뒷배로 채용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의 피해자가 미키이고, 그 미키가 어쩌면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게 감독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16번 죽어도 괜찮지 않다 — 복제인간과 생명윤리
미키는 4년 동안 무려 16번 죽었습니다. 그때마다 프린팅(Printing) 기술로 재생됩니다. 프린팅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체와 기억을 동시에 복원하는 복제 재생산 기술을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솔직히 이건 성매매와 다를 게 없다고 느꼈습니다. 돈으로 신체와 정신을 사는 거니까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연구원들의 태도였습니다. 복사 횟수가 쌓일수록 미키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무게감이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대기 분석을 위해 미키를 연속으로 죽이는 장면은 정말 어이없었습니다. 감독도 인터뷰에서 "더 많은 죽음을 통해 미키의 직업 자체가 죽음임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만, 저는 그 죽음들이 모두 지휘부의 멍청한 결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더 큰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18번째 미키의 성격이 유독 냉소적이고 사이코패스적으로 묘사되는 것도 의도적인 장치입니다. 재생 과정에서 기억 코드가 잠시 빠졌다가 다시 연결되는 오류가 생겼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관객은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전 16명의 미키도 다 조금씩 달랐던 거 아닐까?" 라고요. 여기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건 동일성 문제가 아닙니다. 복제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본질까지 완벽히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복제인간이라 할지라도 각각이 고유한 인격체라는 점입니다.
이는 생명윤리(Bioethics) 논의와 직결됩니다. 생명윤리란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를 다루는 학문 분야입니다. 실제로 유네스코는 2005년 생명윤리와 인권에 관한 보편 선언을 채택하며 인간 존엄성 존중을 핵심 원칙으로 명시한 바 있습니다(출처: 유네스코). 영화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이 질문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냉소적으로 보여줍니다.
나샤가 미키의 죽음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그녀는 이민자 출신으로, 자신의 부모가 차별받고 일자리를 빼앗기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익스펜더블 미키가 받는 대우가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였을 겁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생명윤리 관련 핵심 질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억과 신체가 동일하다면, 복제된 존재도 동일한 인간인가?
- 죽음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가?
- 복제 기술을 활용해 인간을 소모품으로 쓰는 것은 어디서부터 착취인가?
크리퍼는 악당이었나 —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이기주의
크리퍼 이야기가 나오는 지점에서 저는 영화관 좌석을 고쳐 앉았습니다. 지구의 역사가 그대로 재연되는 것 같아서요.
원작에서는 크리퍼가 토착 생명체 정도로만 묘사됩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들을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배치하고, 새끼 크리퍼 하나를 구하기 위해 집단 행동에 나서는 존재로 그렸습니다. 여기서 집단 행동이란 개체가 단독으로 이루기 어려운 목표를 위해 집단 전체가 협력하는 사회적 행동 방식을 말합니다. 놀라운 건 크리퍼가 지적 생명체(Intelligent Species)였다는 사실입니다. 지적 생명체란 언어 사용, 도구 활용, 전략적 사고 등 인지 능력을 갖춘 생명체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거짓말도 하고, 협상도 제안하고, 무고한 인간을 먼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인간들은 어땠나요? 크리퍼를 '미개한 종'으로 규정하고, 그지같은 이름을 붙이고, 말살하려 했습니다. 이건 식민지 시대의 역사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만약 크리퍼가 훨씬 약한 존재였다면, 아니면 훨씬 강력해서 인간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 중 하나는 대량학살을 당했겠죠. 결국 평화가 가능했던 건 힘의 균형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고, 그 우연성이 오히려 더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샬 사령관이 빨간 모자를 쓴 지지자들을 거느리는 장면도 단순한 패러디가 아닙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특정 인물을 비유한 게 아니라 시대를 상징하는 정치인들의 어리석음을 모아 만든 캐릭터라고 밝혔습니다. 이민자 혐오, 벽 세우기, 다름을 배척하는 이기주의. 이것들이 먼 미래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감독의 냉소는 꽤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실제로 UN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강제 이주민 수는 1억 명을 넘어섰습니다(출처: UNHCR). 영화 속 나샤의 이야기가 현실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선과 악은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크리퍼 입장에서 인간은 침략자고, 인간 입장에서 크리퍼는 장애물입니다. 3자의 눈으로 본다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주지 않는 것이 봉준호 감독 방식입니다.
미키17은 보는 내내 편하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관람 후 "나라면 연구실에 침입해 내 복제 데이터를 전부 지워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된 셈입니다. 극장을 나선 후에도 한참 동안 이 질문들을 안고 걷게 되는 영화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