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보다가 "내가 인마! 너희 서장이랑! 밥도 먹고!" 이 대사에서 잠깐 웃다가 금방 불쾌해진 적이 있습니다. 웃긴데 찜찜한, 그 묘한 감각이 영화 내내 따라붙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1982년 부산을 배경으로 한 세관 공무원 최익현이 조직과 검찰 사이를 오가며 살아남는 이야기입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결국 강해진다는 논리를 이 영화만큼 서늘하게 보여준 작품이 드뭅니다.
범죄와의 전쟁 : 세관 공무원에서 반건달로, 최익현의 캐릭터 아크
최익현은 처음부터 악당이 아니었습니다. 1982년 부산 세관에서 일하던 그는 조직의 비리를 뒤집어쓰고 잘리는 희생양, 쉽게 말해 조직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이 도입부에서 처음 느낀 감정은 연민이었습니다. 부당하게 잘린 사람이 밀수품에 손을 댄다는 설정이 납득이 갔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최익현의 외형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꼬질꼬질한 세관원의 모습이 사라지고, 반짝이는 금테 안경을 쓴 권력자의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죠. 저는 특히 탄환이 없는 빈 권총을 품에 넣고 거드름 피우는 장면을 오래 기억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최익현이 어떤 사람인지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한 연출이었습니다. 실력보다 이미지를 먼저 만들어 그 이미지를 실력으로 포장하는 인물.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써먹은 생존 전략의 본질이 거기 있었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물의 내면과 외형이 변화하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최익현의 아크는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순진함에서 냉소로 이행하는 전형적인 부패 서사이지만, 영화는 그 과정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보다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불쾌하고, 동시에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최형배와 '가족론', 조직 논리의 민낯
최형배는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저는 그를 보며 분노보다 연민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그는 최익현에게 "우리 둘이 하나의 몸이 돼야 한다"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최형배를 파멸시킨 원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론'은 조직 논리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수사(rhetoric)입니다. 여기서 수사란 말의 내용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효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논리 안에서 혈연과 의리는 법보다 우위에 놓입니다. 영화 안에서 문중, 항렬, 집안 어른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최익현이 부장 검사와 안면을 트는 경로도, 형배를 초기에 살린 것도, 결국 형배를 배신한 명분도 모두 이 가족론의 언어로 포장됩니다.
최형배가 배신당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틀린 것은 사람을 믿은 게 아니라, 가족이라는 단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그 단어가 도구로 쓰이는 시대에,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진 겁니다.
최익현의 생존 전략, 모호함을 무기로 쓴 인간
조 검사가 최익현에게 "깡패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니고, 넌 도대체 뭐냐"고 묻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합니다. 최익현 본인의 대답도 명쾌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지." 이 모호한 정체성이 바로 그의 핵심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느와르(noir) 장르에서 주인공은 대개 명확한 도덕적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여기서 느와르란 범죄와 도덕의 경계가 흐릿한 어두운 세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그 선택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는 조직의 편도 검찰의 편도 아닌, 오직 자신의 편입니다. 조 검사에게는 형배를 넘기고, 형배에게는 위조 여권을 쥐여주면서 선착장까지 끌고 갑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붙지 않으면서 양쪽의 이득을 동시에 취하는 이 방식은 지독하면서도 정교합니다.
최익현이 구사한 생존 전략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체성의 모호함: 깡패도 공무원도 아닌 경계인으로 양쪽에서 활용 가능한 위치 확보
- 네트워크 활용: 경주 충렬공파 문중 인맥을 통해 검찰과의 접점 마련
- 타이밍 포착: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국가 권력의 방향 전환을 먼저 읽고 선제 행동
- 이미지 선점: 빈 권총처럼 실제 실력보다 권위 있어 보이는 외형으로 협상력 확보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느낀 것은, 최익현이 천재이기보다는 시대를 가장 빨리 읽은 사람에 가깝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근육의 시대에서 두뇌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음을 그만큼 빨리 감지한 인물이었던 겁니다.
시대적 맥락, 1982년 부산이라는 무대
이 영화가 1982년 부산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단순한 시대 설정이 아닙니다. 1980년대 초 한국은 국가 권력이 조직폭력과 착잡하게 얽혀 있던 시기였습니다. 실제로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전, 한국의 조직범죄는 지역 경제와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습니다(출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영화 속에서 시위대의 화염병이 경찰서로 날아드는 장면 한가운데 형배가 칼에 찔리는 설정은 의미심장합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조직의 생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대형 폭력 조직들은 권력의 공백기에 성장했고, 권력이 재편될 때 가장 먼저 정리당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단순한 조폭 영화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범죄 조직의 공생 관계를 해체하는 과정을 그린 사회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어떤 순서와 논리로 전개되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최익현이 결국 살아남은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권력 구조의 재편 방향을 정확히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영화의 가장 냉소적인 메시지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단순히 "나쁜 놈들이 잡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불쾌함이 남은 이유는 최익현이 처벌받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생존 방식이 현실에서도 유효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혈연으로 법을 우회하고, 모호한 위치에서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1982년 부산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요.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쯤 보시길 권합니다. 다만 통쾌함보다는 씁쓸함이 더 오래 남을 수도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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